‘서태지와 아이들’ 에 대한 단상

요즘 서태지가 데뷔 15주년이라고 쫌 이슈가 되고 있다.
서태지,,, 내가 정말 서태지를 좋아했었나?

고등학교때 난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서태지와 아이들"은 정말 좋아했었다.
항상 그렇듯 너무 인기가 많으면 나에게는 반감이 생겨서인지 (나 약간 반골기질?) 
(뉴키즈 온더 블럭에서도 난 하필 그 인기 없는 조나단 나이트를 좋아했다. ㅋㅋ)
서태지는 별로였었고 양군을 좋아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의 팬은 아니다. ^^;
(그 학창시절 당시 난 유덕화, 토미 페이지, 최수종을 좋아했다… 내 책가위를 뒤덮었던 그들..
그후 주성치라는 내 인생의 거대한 스타가 생기면서 나에게 영원한 아이돌은 주성치 뿐 ㅠ.ㅠ)
난 알아요도 좋아했지만 환상속의 그대나,, 특히 단짝 친구와 죽음의 늪을 따라 부르며 좋아했다.

음악도 서태지가 따로 낸 음반은 별로 관심가지 않았던 듯..
내가 참 좋아했던 서태지의 음악은 (그래.. "서태지와 아이들"이지만 왠지 음악만 갖고 얘기하자면
서태지의 음악이라고 해도 무방할듯 하다) 수시아, 필승,,, 서태지와 아이들때의 음악이었다.
그 뒤 서태지가 홀로 독집을 냈을 때는 그닥 나의 관심밖이었다.
근데 난 서태지가 나온다는 콘서트를 두번이나 갔단 말이지..-_-;; 
한번은 광주에서 김종서 콘서트.. 그때 게스트가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두번 째는 친구따라 강남가듯.. 공짜 티켓이 있는 친구들 따라 
서태지 공연(그가 컴백 비스무리 했떤 04년으로 기억됨)을 갔다..

내가 좋아했던, (한창 무주서 보드타던 시절 리프트에서 옆자리에도 한번 앉았었던!) 양현석은,, 
정말 거대한 기획사의 사장님으로 잘나가고 있고… 
그가 키워낸 스타들을 보라,, 빅뱅, 지누션, 빅마마, 거미, 휘성,,, 대단스! 더이상 이야기가 필요없다.

이주노, 이주노는 영턱스 클럽으로 잘나가나 했더니, 사업을 잘못 손대 좀 흔들렸던듯 하나,
몇년 전 (아직도 크게 유명세를 타거나, 스타의 반열에 들지는 못했지만) 댄스천재 팝핀현준이라는 존재를 알았고,
그의 뒤에 이주노가 있었다는 걸 알고 팝핀현준 하나로만 '역시 이주노군..' 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주노가 주춤거려 좀 안타깝긴 하지만 팝핀현준 같은 애 하나만 더 만들어 낸다면,,
아니면 팝핀현준의 예술적 경지(그의 춤은 예술이다..)를 대중적인 기호에 잘 결합만 시킨다면,, 
이주노에 대한 나의 그런 안타까움을 떨쳐낼 수 있으련만..
팝핀현준의 동영상을 접할 때마다 매번 소름이 돋는 나… 그의 국악접목 춤을 보았는지…
마네킨 흉내(?) 내는 독특한 UCC를 보았는지.. 그런거 하나 하나 볼때마다 느낀다.. '사실 나 팝핀현준 팬이야' ㅎㅎ

서태지, 뚜렷한 후계자는 없지만 아직도 그를 대장이라 부르는 추종자는 많다. 서태지…
(머.. 피아와 넬이 내겐 빅뱅과 팝핀현준보다는 큰 존재로 다가오지 않는다)
어쨌든 데뷔 15년이 지난 후 그들은 저런 길을 가고 있구나..
음,, 나의 결론은 어쨌든,,, 그런 셋이 함께 했었을 때가 가장 빛이 났던 때가 아니였나 한다.
보고싶다 서태지와 아이들…

6세 소녀의 그림 수입이 무려 20만달러?

[Scrap]

미국의 한 어린 소녀가 자신의 그림을 팔아 번 돈이 무려 20만달러(한화 약 1억 8천만원)에 달해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주인공은 뉴욕에 사는 6세 소녀 말라 옴스테드(Marla Olmstead).

아마추어 화가인 아버지 마크 옴스테드(Mark Olmstead)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그림과 매우 친숙했다는 말라는 3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인 마크는 “아내의 초상화를 그리는 도중 어린 딸 아이가 그림 옆에 앉아 자신도 그리게 해달라고 졸랐다.”며 “그 이후 말라에게 그림에 대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마크는 말라의 그림을 친구의 권유로 한 카페에 전시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얼마 후 첫 그림은 250달러(한화 약 23만원)에 팔리게 되었다.

이후 말라의 그림을 찾는 사람이 점점 늘면서 뉴욕의 한 화랑에서’4 years old’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그림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7년 국제 선댄스 영화제에 아미르 바르-레브 (Amir Bar-Lev) 감독은 ‘내아이는 저것을 그릴수 있었다’(My Kid Could Paint That) 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출품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이의 인기가 높아지고 각종 매체에 의해 ‘천재소녀’라고 소개가 되면서 말라의 부모는 “자식을 팔아 돈을 번다.” “아버지가 대신 그린 것 아니냐” 등의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말라의 부모는 “아이가 매스컴에 의해 상처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조용히 작품활동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위쪽은 말라와 그의 그림(the sun), 아래는 영화 포스터

☞ [관련기사] 말라 출연 동영상 보기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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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이 아이에 대한 기사가 궁금하다면 트랙백을 클릭 하세요.. 
이 기사를 접하고 설마 그아이? 했는데,,, 그 아이가 이 정도 성장(?) 했다..

거침없이 하이킥

와 곧 끝난다니 아쉽네… 5회 방영분만 남은거다.
근데 어제꺼까지 본 바로는,, 거기 이슈가 되는 러브라인은 다 싫다는거 -_-

민용, 민정 – 왠지 싫다.. 민용 민정 캐릭을 싫어하는건 아닌데 둘이 같이 있으면 싫다. 둘이 결혼 안했음 좋겠다..
민용, 신지 – 괜히 불쌍해보이고 떼쓰는 것 같은 신지가 싫다.. 
불쌍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해서 다시 민용과 연결되는 건 구차하다.
민정, 윤호 – 윤호가 결혼하지 말라고 완전 고백 했었을 때 느므 어색했다… -_-;

윤호, 혜미 – 들러붙는 혜미 캐릭이 꼴뵈기 싫다.. (나 윤호팬 아님, 혜미 떼주세요~ 하는 윤호팬들도 싫다 -_-;;) 
혜미를 얼굴에 맞게 좀 쿨한 애로 만들어 주시지.. 왜 이리 비호감 캐릭으로 전락해버렸나..

신지, 이형사 – 두사람 연결된다면 참 이상하다. 이형사만 불쌍하다.. 
이 배우분 이런 캐릭으로 나오기엔 참 맛깔스런 조연 잘하시는 분인데, 
러브라인 괜히 낑기지 말고 그런 쪽으로 더 살려주시지 아쉽다..

거기 나왔던 유미 가족 미스테리 부분이나, 개성댁 이야기
이런 스토리들은 시트콤에서 보니 참 신선했다.
암튼 어떻게 스토리 정리가 될지 모르겠으나 6개월 넘게 재밌게 봐왔던 프로가 하나 곧 끝난다니 아쉽다 ㅠㅠ
이제 티비에는 볼게 없어지는구만… 드라마도 보는 게 없으니 말야. CSI 다시 볼까나,,

Ego Wrappin’ – Midnight Dejavu


Yoshie Nakano (21/04/74)
Vocal/ songs and lyrics

Masaki Mori (28/02/74)
Guitar/songs

  
EGO-WRAPPIN’ profile
 

EGO-WRAPPIN’ is a unit formed in 1996 in Osaka. Members include Yoshie Nakano (vocals, writes lyrics and music) and Masaki Mori (guitar, writes music).

They established the project in their hometown of Osaka and later relocated to Tokyo. 
Persistent sales of their exceptional debut “Blues of Colors” (2000) built nationwide recognition, representing their unique artistry through cabaret music and Showa popular songs, which was inspired by Jazz of the pre-war years. 

EGO-WRAPPIN’ is a unique and rare artist. Each work constructed with novel and fascinating musicianship, draws the attention of the Japanese music scene. The EGO-sound reflects free atmosphere and hot emotion, which Jazz and Rock music had prior to becoming just titles of genres, and draws from the spirit of our living world.

Facing music sincerely, jumping the walls of genres easily, they will tell you how to enjoy music with their pop sense. You feel their song vibrations directly. EGO-WRAPPIN’s thrilling performances of their exciting material have become romantic miracles of today.

마왕 & 히트

요즘, 월화수목 빼놓지 않고 보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마왕과 히트..
이게 시작도 같은 주에 하더니 다음 주에 두개 다 끝난다. ㅠㅠ
둘다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왠지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두 드라마..
비슷한 점은 형사물 이란 점, 과거와 얽힌 트라우마가 있는 주인공
그 주인공인 형사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난다는 점,, 
다른 점은 히트가 좀더 스펙타클하고 코믹한 면도 많고,, 
러브라인도 더 드러나 있는 반면,
그에 비해 마왕은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많고, 조용하게 진행되는 사건들,
러브라인도 아직 불분명하고,,
사실 마왕이 조금 더 재미있는 편이지만, 
히트도 볼만하다.

마왕이 재미있어서 지금 하나티비로 부활도 보고있는데
3편까지 봤는데 재밌을것 같다!

한화 회장 폭행 사건

 

남대문 경찰서에 김승연 회장 오기 전 경철서 사람들 리허설 장면을 찍은 사진이라는데,
먼넘의 왕이라도 행차하시는지 리허설 까지 하고 생난리인가 하고 사진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뒤에 버스 광고판 '쇼를 하라' 너무 웃기다 ㅋㅋㅋㅋ

스윙댄스~ 유후!!


[Scrap]

여러분은 혹시 '스윙댄스'라는 춤을 보신 적 있으세요?

스윙댄스는 스윙재즈 음악에 맞춰 추는 춤입니다.
그러나 신나는 락앤롤, 가요로도 충분히 출 수 있는 유쾌발랄한 춤이기도 하지요!

스윙댄스는 찰스턴, 지터벅, 린디홉, 발보아, 쉐그, 블루스 등으로 나뉘어집니다.

미국에서 1900년대 초반에 흑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가 20세기 중반 거의 자취를 감추었는데
20세기 후반에 다시 극적으로 회생하여 현재 미국 뿐만 아니라 호주, 유럽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스윙댄서 인구는 약 10만명 정도로 추산되며, 매년 2~3만명 이상의 신규 동호회원이 증가추세입니다.

대표적인 스윙댄스 동호회는 스윙패밀리, 스윙스쿨, 스윙프렌즈, 엔조이스윙, 크레이지스윙, 스윙이즈, 스윙바다, 해피스윙, 박쥐스윙, J Swing 등 서울에서만 약 50여개의 스윙댄스 동호회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대부분 Daum이나 Naver의 카페에서 운영되며, 동호회 가입이 1~2만원에 강습료는 무료입니다.

서울시내 스윙빠는 총 8개입니다. 강남(헬로우스윙), 신사(더스윙), 신림(부기우기), 구의(라틴플러스원), 홍대(해리앤피터), 이대(이포유), 서울대(올댓스윙), 건대(피에스타)에 있으며, 일주일 내내 스윙빠는 문을 엽니다. 입장료는 5,000~7,000원이며, 음료수 포함 가격입니다.

작성자 : 화성인(스윙패밀리 7기) 

케빈카터를 위한 변명/소녀 죽기를 기다리는 독수리

[Scrap]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독수리 

Kevin Carter 

1994년 퓰리처상 수상 (수상자는 3개월 뒤 자살) 

수단 남부에 들어간 카터가 
아요드의 식량센터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마주친 것은 굶주림으로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 소녀가 쓰러지면 
쓰러진 소녀를 먹이감으로 
삼으려는 살찐 독수리가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셔터를 누른 후 그는 바로 
독수리를 내 쫓고 소녀를 구해주었다.

이 사진은 발표와 동시에 전세계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후….. 
일부에서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케빈 카터(Kevin Carter)는 
수상후 3개월 뒤 1994년 7월 28일에 
친구와 가족 앞으로 쓴 편지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