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저장계 3 – SF단편 [감정저장계]

3. 슬픔

진에게는 미대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진, 나야. 잘 지내?"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았다.
그들은 진의 집 근처 바에서 만나기로 했다.

진은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매우 수척해지고 까칠해진 얼굴, 담배를 피워대는 그.
"무슨 일 있어?" 진이 물었다.

"그녀가 떠나.."
그에게는 대학 때부터 사랑을 했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같은 미술대학 동기였고, 5년을 연인 사이로 지냈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여자 친구의 집에서 그를 반대했다고 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미술학도라며.
집안의 성화로 급기야 그녀는 다니던 미술관을 그만 두게 되었고,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녀는 끝내 울면서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우리 인연은 여기서 끝인가봐. 나 떠나야 해. 너무 미안해"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진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한달 동안 연락을 못했어. 일주일 후면 그녀가 떠나는데.."
그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한달간 집에서 그림 하나만 그렸어. 왠지 그걸 꼭 그리고 싶더라구..
그녀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 그림을 주고 싶어"
진은 이야기를 다 듣고, 친구를 재촉했다.
"내가 같이 가줄께..지금 당장 가자.. 시간이 얼마 없잖아"

그의 차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뒷좌석에는 종이에 쌓인 그의 그림이 놓여있었다.
차를 세운 후, 그는 조심스럽게 그림을 들고 그녀의 집으로 걸어갔다.
진은 그러는 와중에도 스치듯 '오늘 슬픔 100을 담아볼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쁜 진..!)
진은 살짝 감정저장계를 꺼내 친구의 뒤에서 걸으며 그의 귀 근처로 가져가 보았다.
슬픔의 수치는 67.. '그래도 한달 동안 많이 추스렸나 보네'

그녀는 그의 전화를 받고 집앞으로 나왔다. 가로등 아래에서 그는 그녀에게 그림을 건냈다.
"널 붙잡지는 않을께. 그 대신 이 그림을 마지막 선물로 주고 싶어"
진은 친구의 손에 살짝 다시 감정저장계를 갖다댔다. 슬픔의 수치는 93..

그는 그녀가 그림의 포장을 푸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림을 가만히 보던 그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흐른다.
진도 그림이 궁금해 그녀가 서 있는 쪽으로 가서 그림을 보았다. 
그림 속에는 오래된 갈색 탁자 위에 석류 두개가 놓여 있었다.

한개는 껍질이 아주 빨간데다 속이 벌어져 있어 빨간 알갱이가 곧 터져 나올 듯했고,,
다른 한개는 단단해 보이는 껍질에 아직은 노르스름한 상태로 닫혀있는 모습이었다.

빨간 석류 알갱이 하나 하나를 보고 있자니 왠지 그의 진한 슬픔이 전해졌다.

그녀의 귀 근처에 감정저장계를 대보았다.
감정저장계는 빨간불이 들어왔고, 슬픔 100을 저장했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짧게 이야기 했다.
"꼭 기다려 줘.. 그림은 너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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