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璧) – 성탄절을 위한 콩트
내 친구 레이 박사는 영국의 많은 유명인사들이 의젓하게 모여서 지내온 부들즈 클럽의 저 기분 좋게 낡은 안락의자 하나를 골라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온기가 기분 좋게 느껴질 만큼 불 가에서 적당하게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래 아무것도 생각 안나요? 하고 그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나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생각 안 나요. 보름 전부터 나는 꼭 벽에 부딪친 기분이라니까요.
내가 이 옛 친구를 찾아온 것은 활력과 낙천적인 기분과 정신의 집중력을 자극시켜준다는 저 새로운 기적의 약을 한 가지 처방해 달라고 부탁하려는 의도에서 였다. 십 이월달이 가까워오고 있었고 나는 유명한 청소년 신문의 편집국장에게 성탄절 콩트 한 편을 -나의 청소년 독자들이 내게 마땅히 기대하게 마련인 건전하고 참한 이야기 하나를- 써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성탄절이 다가올 떄면 언제나 참하고 재미있고 달콤한 이야기가 하나씩 생각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밤이 길어지고 상점의 진열장에 장난감들이 잔뜩 쌓일 때면 그런 이야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올랐어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영감이 아주 내게서 떠나버린 느낌이라구요. 나는 벽에 부딪친 거예요.
하고 나는 풀이 죽은 기분으로 그에게 설명했다. 그 훌륭한 개업의의 두 눈이 꿈에 잠긴 듯한 빛을 띠었다.
아, 그렇다면 당신이야말로 아주 멋진 테마를 찾아낸 셈인데요… 어째서요?
벽이라…나는 당신에게 약 처방은 해주지 않겠습니다. 나는 부들즈 클럽에서 개업한 의사가 아니니까. 더욱이 그 돼먹지 못한 약이 필요하다면 병원으로 오세요. 값은 몇푼 되지 않아요. 그러나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 수는 있어요. 그 주제가 바로 어떤 벽인데.아니, 그 벽이라고 해야 마땅하겠지요.
직접적인 의미와 동시에 상징적인 의미를 다 가진 벽 말예요. 우정과 따뜻한 체온과 신기한 일에 대한 거의 견딜 수 없는 욕구로 사람들의 가슴이 죄어드는 섣달 그믐날의 어느 싸늘한 밤에 일어난 일이지요. 그 이야기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나는 풋나기 의사 시절에 스코틀랜드 야드 소속의 법의로 일했습니다. 그러니 한밤중에도 사람들이 찾아와서 나를 침대에서 끌어내 가지고는 다시는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된 저 가련한 작자들을 검사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흔히 있었지요. 바로 이렇게 해서 어느 십이월달의 그 기분 나쁘게 노란 꼭두새벽에 이런 방면이라면 런던의 새벽이 극치지요- 나는 얼 코트의 저 끔찍한 어느 사글세 집에 가서 사망 진단을 하도록 호출을 받았답니다. 얼 코트라면 그 쓸쓸하고 추악한 모습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내 앞에는 어떤 젊은 대학생의 시체가 놓여 있었습니다. 약 이십세 가량 된 그 젊은이는 바로 그날 밤에, 가스통 속에 실링화 동전을 몇 개씩 집어넣어야 비로소 난방이 되는 그 비참한 어느 방안에서 목을 매고 자살을 한 겁니다. 나는 진단서를 쓰기 위하여 그 싸늘한 방안의 탁자 앞에 가 앉다가 신경질적으로 휘갈겨 글을 써놓은 몇장의 종이 위에 눈길이 갔지요.
무심코 거기에 눈길을 던졌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읽기 시작했답니다. 그 불쌍한 청년은 거기다가 자기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설명해 놓은 겁니다. 여러모로 보아 그는 고독을 견디지 못해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생각되더군요. 그에게 는 가족도 친구도 돈도 없었는데 성탄절이 되었으니 그저 온통 그리운 것은 따뜻한 손길, 사랑, 행복.그런 거였지요.
바로 여기서 이야기는 점입가경, se corser 프랑스말로는 이렇게 말하지요. 아마?- 이 됩니다. 그 옆방에는 어떤 처녀가 살고 있었답니다. 그는 여자를 알지는 못했지만 종종 층계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천사같은 아름다음-이런 표현을 보면 이 청년이 매우 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에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청년이 쓸쓸함과 절망과 싸우며 몸부림치고 있는 바로 그때 벽을 통해서 옆방으로부터 무슨 소리가 들렸던 거예요. 뭔가 삐걱거리는 소리, 한숨소리 같은 것이었는데 그의 편지 속에는 특징적인 것이라고 지적되어 있고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성질의 것인지 알아차리기가 너무나 쉬운 그런 소리였다는 겁니다. 그 소리는 청년이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하여 들렸을 가능성이 짙어요. 왜냐하면 이 친구는 마치 분노와 멸시를 통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것을 자세하게 묘사했고 그의 글씨에는 매우 흥분한 정신상태의 흔적이 있으니깐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영국 청년치고는 그 편지가 상당히 대담하고 또 분노와 절망감이 깃든 아이러니를 통해서 그는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묘사를 했답니다. 그는 적어도 한 시간 동안이나 문장 그대로 관능의 헐떡임 소리를 들었으며 내가 여기서 구태여 자세한 묘사까지는 않겠습니다만 침대가 삐걱거리고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편지에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벽에다 귀를 바싹 갖다 붙이고서 그런 종류의 추잡한 몸부림소리에 귀를 기울인 경험이 있지요.
천사같은 옆방 여자의 관능적인 신음소리는 특히 그가 처하고 있었던 고독과 절망과 모든 것이 역겹게 느껴지는 상태에서는 여간 가슴 쓰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남몰래 그 여자에게 연정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고 고백하고 있으니까요. 그 여자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감히 말도 걸어보지 못했다고 그는 썼어요.
그는 내 가슴을 뒤집어 놓은 듯하고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그 추악한 세계에 대하여,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그 나이의 영국인이면 흔히 품을 수 있는 쓰디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요컨대 틀림없이 과민하고 매우 순수하며 더할 수 없이 고독하고 애정의 결핍으로 가슴 저리는 그 청년의 머릿속에서, 자기는 소심해서 감히 말도 못 걸었던 그 신비한 찬사, 그런데 지금은 벽을 통하여 당신도 충분히 알만한 형태로 어지간히도 속세의 냄새가 나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그 천사에 대하여 어떤 생각이 오갔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겁니다. 그래서 그는 커튼 줄을 뜯어내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행동을 저질렀던 겁니다. 나는 그 종이에 써진 글을 다 읽고 나서 진단서에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기 전에 나는 잠시 동안 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벽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사랑의 몸부림이 끝난 지 오래되었고 그에 뒤이어 기분 좋은 잠이 그들에게 찾아온 모양이었어요. 인간의 본성에는 그처럼 한계가 있는 법이 거든요. 나는 만년필을 주머니에 꽂아넣고 손가방을 챙겨 들었습니다 나는 그 가방을 프랑스말로 뫼랑빌(시내에서 죽다라는 뜻의 조어:역자)이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경찰관과 자다가 깨어나서 아주 기분이 안 좋은 상태인 집주인 여자와 함께 밖으로 나오려다가 갑자기-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어떤 호기심이 동하는 거예요. 물론 그럴싸하고 아주 알맞은 핑계를 찾는 것은 어렵지가 않았어요. 결국 따지고 보면 그 처녀와 그의 쾌락의 상대자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그 방과 겨우 얄팍한 충분히 그렇다고 짐작할 수 있지 않아요?- 벽 하나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어요. 그러니 어쩌면 그들에게서 들어볼 만한 무슨 말이, 추가함 직한 무언가가 새로운 단서 같은 것 말이에요-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내 행동의 주된 동기는 어떤 종류의 호기심 불건전하달까 시니컬하달까 하여간 좋으신 대로- 이었다는 사실을 구태여 감추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 나는 나직한 비명과 한숨 소리를 냄으로써 그토록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그 천사같은 존재에게 잠시 길을 던져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겁니다. 요컨대 나는 문에 노크를 했던 겁니다. 아무 대답이 없더군요. 아마 공모자가 아직도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쩔 줄 몰라하는 두 남녀를 눈으로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고 그냥 밑으로 내려가려 하는데 집주인 여자가 두세 번 문을 두드리면서 미스 존스! 미스 존스!하고 불러 본 다음 열쇠뭉치를 찾아 들고서 문을 열었어요.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리는가싶더니 집주인 여자가 말이 아닌 얼굴이 되어 가지고 방 밖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내가 들어가서 커튼을 활짝 잡아당겨 열었습니다. 눈길을 침대 위로 흘끗 던져보기만 해도 사태는 짐작할 만했어요. 벽을 통해 들려오는 바람에 그 절망적인 행동을 저지르게 했던 그 신음소리와 경련적인 비명과 한숨소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그 젊은 대학생은 완전히 오해를 한 것이었어요. 베개 위에는 비소 음독으로 인한 그 모든 고통과 흔적으로도 그 어여쁜 모습만은 지워지지 않은 금발의 머리가 얹혀 있었습니다. 그 처녀는 벌써 사망한 지 여러 시간된 듯했고 죽기 전에 매우 오랫동안 몸부림친 것이 분명했습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편지로 미루어 보아 자살의 동기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대강만 보아도 그건 고독..그리고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싫증, 그 중에서도 급성이더구먼요.
레이 박사는 입을 다물고 정다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건너다 보았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앉아 있던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뭔가 항의하는 말이 입 끝에 맴돌기만 할 뿐 몸이 굳어진 채 꼼짝도 못하고 가만 서 있었다.
그래요. 벽이지요. 하고 의사는 몽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이만하면 성탄절 콩트로서 흥미를 끌 만한 주제이고 제목도 이미 다 정해진 셈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바야흐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비의 계절이 오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