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위대한 회화는 질병의 산물이었을까. 최근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눈동자가 바깥쪽으로 몰리는 ‘외(外)사시’였으며 이 때문에 렘브란트가 명화를 그릴 수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수련(睡蓮)’은 화가가 말년에 백내장을 극복한 성과라는 설명이 유력하고, 19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 나타나는 불타는 황색은 그가 즐긴 술의 부작용 ‘덕분’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명한 그림을 통해 화가의 질병을 연구한 사례를 살펴보자.》▽입체를 캔버스로 옮기는 데 사시가 유리=미국 하버드대 의대 신경생물학과 마거릿 리빙스턴 교수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36점을 분석해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즉 렘브란트의 왼쪽 눈은 정면을 향하는 반면 오른쪽 눈은 정면에서 평균 10도가량 바깥쪽을 향하는 외사시임을 밝혀냈던 것.
이번 연구결과는 의학전문지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 9월 16일자에 실렸다.
리빙스턴 교수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렘브란트가 외사시라서 사물을 입체적으로 볼 수 없었지만 오히려 3차원 현실을 2차원 캔버스로 옮기기 쉬웠다”고 설명했다. 실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울 때 한쪽 눈을 감도록 해 입체적 장면을 평평한 화면에 그리는 능력을 키우는데, 렘브란트는 이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
또 리빙스턴 교수는 유명화가 53명의 사진을 조사해 샤갈, 피카소 등 14명이 사시라는 점을 확인하기도 했다.
▽고흐의 해바라기에 술이 일조?=1990년대부터 미국 의사 중 일부는 미술작품에 나타난 특징과 화가의 병을 연결시켜 논의해 왔다. 특히 이들은 고흐가 뇌종양, 백내장, 조울증, 정신분열증, 마그네슘 결핍 등 100가지가 넘는 질병을 앓았다고 주장했다.
한성대 미디어디자인학부 지상현 교수는 “고흐의 그림 일부에는 소용돌이 모양이 그려져 있다”며 “이는 고흐가 눈앞에 소용돌이가 어른거리는 질병인 색소성 망막염을 앓았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또 고려대 의대 법의학교실 문국진 명예교수는 “고흐의 그림 ‘해바라기’에는 불타는 노란색이 유난히 돋보인다”며 “이는 압생트라는 술을 즐기던 고흐가 사물을 볼 때 강한 노란색을 보게 되는 황시증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압생트는 약쑥을 증류해 만든 술로 시신경을 손상시키는 물질을 포함하고 있어 많이 마실 경우 색채 이상의 시각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모네의 백내장 vs 르누아르의 관절염=모네처럼 질병을 극복해 명작을 남긴 사례도 있다.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을 10년 이상 앓다가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 그의 그림에서는 물체가 흐릿하게 나타나고 노란 색채가 주를 이뤘다. 백내장 환자들은 노란색을 잘 보지만 파란색 계통은 잘 보지 못한다. 수술 후 모네는 4년 동안 그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되는 연작 ‘수련’을 완성했다. 한편 프랑스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질병으로 인해 그림 스타일이 바뀌게 된 경우다. 문 교수는 “말년에 찾아온 류머티스 관절염 때문에 르누아르는 손가락이 변형돼 자유롭게 손을 쓸 수 없었다”며 “관절염을 앓기 전과 후의 비슷한 그림을 비교해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르누아르는 ‘목욕하는 여인들’이란 그림을 1884∼1887년과 1918, 1919년에 각각 남겼다. 이전 작품에는 드레스에 가려진 풍만한 육체, 윤기 나는 머릿결 등이 배경과 뚜렷하게 구별돼 있지만 관절염이 심해져 비틀어진 손가락 사이에 붓을 넣고 끈으로 맨 채 그린 이후의 작품에는 비만으로 굵은 뱃살을 지닌 여인들이 배경에 묻혀 보인다.